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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안녕

일상생활/일상의 발견

by 배디 2021. 9. 21.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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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 3주
뜨거운 안녕

 


 

취준생 시절엔 간절하도록 입사를 꿈꾼다. 입사만 하면, 직장인이 되어 돈만 벌면 행복할 것 같았다. 하지만 입사와 동시에 신기하게도 퇴사라는 씨앗이 마음에 심어진다. 어느샌가 그 씨앗이 자라 싹이 트고 자라다보면 마음속엔 온통 퇴사만 가득 해지는 날이 오기도 한다. 아득하기만 했던 그날이 나에게도 찾아왔다. '퇴사'라는 이별과 뜨거운 안녕을 경험했다. 

상조회 선물

회사 상조회에 쌓인 적립금이 많아 이번 달에 바람막이를 단체로 구매했다. 곧 나갈 사람이 받으려니 기분이 맹했지만 좋아하는 딥그린 컬러에 등산복으로 딱이다 싶어 기분 좋게 받았다. 이런 걸 보면 나는 참 운이 좋다. 

 

편지지

지난 주 주말에 다이소에서 50개 정도의 카드를 샀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쓰고 싶어서. 내가 떠남으로 인해 남겨진 사람들이 당분간 힘들어질 것을 알기에 소소한 기쁨을 선물하고자 했다. 

 

자필 카드 

솔직히 모두에게 진심을 다해 적은 것은 아니다. 형식적으로 쓴 것도 더러 있다. 하지만 친했던 동료들에게 카드를 쓸 때는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았다. '우리 모두 행복하자고, 건승하자고' 

 

연금복권

모든 직장인의 꿈이 퇴사인 것을 알기에 연금복권을 카드에 하나씩 넣었다. 어떤이는 누가 1등 당첨되면 배 아프지 않겠냐고 물었다. 잠깐 고민을 했지만 누군가 당첨이 되더라도 그것은 그 사람의 복이지 나의 복이 아니다. 애초부터 내 것이 아니므로 당첨된다고 해도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누군가에게 귀인이 된다면 그걸로 된 거다.

 

50장의 카드 

대단한 건 아니지만 다 쓰고 나니 마지막 할 일을 끝낸 것 같아 뿌듯했다. 이걸 받을 때 사람들의 행복한 표정을 상상하니 나도 행복해졌다. 역시 surprise and delight. 인생의 모토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나는 그냥 이렇게 태어났다. 

포항 출장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바쁜 스케줄에도 무리해서 포항시립미술관으로 출장을 갔다. 일을 인계하기 위함이었다. 내 결정이, 나의 의견을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말이 아닌 행동이나 시각적인 것이 더 효과적이기에 시간을 들여서라도 보여주려고 했다. 어떻게든 욕은 먹게 되는 거라지만 내가 들인 노력과 시간을 헛된 것으로 평가받게 그대로 놔둘 수는 없었다. 그것은 스스로의 자존심의 문제니까. 

 

포항시립미술관 기획전시 중

다행히 담당자와 직속 상사의 반응은 괜찮았다. 담당자를 인사시키고 무사히 인계를 마쳤다. 더 이상 미련은 없었다. 

 

자주가던 카페에서의 식사

사적으로 인연이 있던 동료와 함께 식사를 하며 연애와 결혼에 대해 담소를 나누었다. 이야기의 결론은 30대는 단순히 열정만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나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현실에 안주하기엔 너무 젊은 나이다. 모든 게 가능하기 때문에 실제로 아무것도 하지 않기도 하고, 생각만 했던 것들이 현실로 다가왔을 때 선택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 벅차기만 할 때도 있다. 어렵지만 선택을 해야 한다면 어떤 게 최우선 가치가 되어야 할까. 나의 선택은 '성장'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 글쎄. 그때도 지금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처음이자 마지막

타 본부의 본부장님과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술자리를 가졌다. '진작 이런 자리를 자주 가졌더라면 무언가 바뀌었을까?'라는 생각이 스치듯 지나갔다. 취기를 빌려 마음속에 두고 있던 응어리들이 녹여져 나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본부장님께 쓴 편지의 문구만이 기억난다. '제가 사랑하는 동료들이 즐겁고 행복하게 다닐 수 있는 환경으로 바꾸어주세요'라고.   

하하호호

오랜만에 기억이 가물가물해질 정도로 술에 흠뻑 취했다. 술에 취한 건지 퇴사의 기쁨에 취한건지 모르겠지만 그저 행복했다. 

옥의 티 

자동차 앞 유리에 생긴 조그마한 금이 계속 눈에 거슬렸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찝찝하여 결국 거금을 들여 수리를 맡겼다.  

후배들과의 식사 

같은 실 여자 동료들과 식사를 했다. 나보다 나이가 다 어리고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궁금한 것도 많고 물어볼 것도 많았던 친구들. 내가 느낀 모든 걸 말할 수는 없었지만 단지 이 친구들이 상처 받지 않고 행복하게 회사생활을 하길 바란다.  

가슴을 울리는 메시지

관장님께서 책 한 권을 퇴사 선물로 주셨다. 맨 첫 번째 페이지에 쓰여있던 문구가 가슴을 울렸다. "장도를 격려하며, 국가와 사회의 동량으로서 더 큰 뜻을 이루길 기원드립니다." 그래, 나는 단순히 조직에 대한 염증 때문에 퇴사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 내가 꿈꾸는 것들을 이루기 위해 큰 결심을 한 것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만큼 뒤돌아보지 말고 나아가자.    

흔적

캐비닛 정리를 하다가 발견한 종이. 혼자서 전수조사를 하며 수량 파악과 문제점을 찾으려고 했던 나날들이 문득 생각이 났다. 비록 사업규모는 비교적 작지만 나 스스로는 뿌듯했던 프로젝트였다. 이 프로젝트 덕분에 전시관-전시존-전시물-전시 패널 등 전시 흐름과 정보전달 체계에 대해 배우는 계기가 되었으니까.    

행복했던 퇴사

마지막 날까지 인수인계가 끝나지 않아서(퇴근 한 시간 전에도 인계자가 정해지지 않았다...)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직장동료들이 서프라이즈 파티를 해주었다. 감동적인 순간이었음에도 그 당시 불안함과 예민함 때문에 제대로 인사를 못한 것 같아 너무 죄송하다. 대부분의 직장동료들이 내 자리에 와주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혹시나 방역지침에 위반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한 것도 생각해보니 웃기다. 과분한 사랑을 받고 떠날 수 있어서 감사하다.   

퇴사파티

고3 동창들과 함께 한 파티. 여자 넷이서 와인 4병과 음식 6개를 먹은 기록을 세웠다. (오후 5시에 시작해 마감까지 테이블을 지킨 것도 그렇고, 도중에 와인이 모자라서 다시 사러 나간 것도) 와인 먹고 너무 취해서 집에서 고대로 뻗었다. 

뜨거운 안녕

회사에서 가져온 짐들을 정리하고 나니 퇴사가 실감이 난다. 그리고 진짜 끝. 새롭게 시작이라는 게 느껴진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후회가 남기에, 아쉬움은 이제 더 이상 넣어두고 설렘으로 눈 뜨는 하루를 즐기고 싶다. 본부장님께 보낸 편지처럼 이번 퇴사를 내 스스로 한 층 더 업그레이드 되는 계기로 삼아야지.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 라는 표현을 빌리자면
알고보니 나간건 소가 아니라 호랑이였고
외양간이 아닌 성(castle)이 었다는 게 밝혀지도록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건승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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