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4주
쉼의 시작
1. 퇴사 이후가 바로 추석 연휴. 완전한 휴식을 알리고 있었다. 퇴사 선물로 부모님께 용돈을 드렸다. 동생에게도ㅎㅎ. 앞으로 멀리 떨어져 지낼 생각을 하니 애틋한 마음이 생겨난다. (역시 떨어져 있어야 하는 건가..)
2. 외가댁 산소에 가는 김에 복순도가에도 가고 언양시장도 가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조카와 함께 하는 첫 명절이라 정신이 없긴 했지만.
3. 생탁만 고집하던 아빠가 복순도가에 눈을 떴다. 막걸리 시음을 맛깔나게 하는 아빠를 보며 재밌으면서도 짠했다. 나이가 드시면서 새로운 걸 배우는 게 익숙지 않으시니 힘든 걸 굳이 고집하실 때가 많다. 나는 가끔 그런 게 못마땅할 때가 있다. 세상이 이렇게 좋아지고 있는데 더 많은 걸 경험하셨으면 좋겠다. 고생도 그만하시면 좋겠고.
4. 고등학교 단짝이었던 HJ와 약속을 잡았다. 서울 기차시간이 정해진 탓에 부산역에서 순대국밥 한 그릇을 뚝딱하고 근처 핸즈 브라운 백제에 갔다. 10년이 지나도 그녀는 변함이 없었다. 다만 20대 중반에 만났을 때는 사회 초년생이라 직장생활에 힘들어 보였는데, 이제는 어느 정도 자리도 잡고 한결 편안해 보였다. (벌써 6급이라는 것도 놀라웠다) 결혼할 생각이 없고 지금처럼만 살고 싶다는 친구의 말에 사람 인생은 어떻게 되는지 모르니 함부로 단언하지 마라고 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꼰대 오지랖인 듯 하다). 알아서 잘할 친구인데. 친구 부모님의 배웅하실 시간이 다 되어 헤어졌는데 마음 한편이 뭔가 아쉬웠다. 다시 전화를 걸어 삼진어묵 한 팩을 사서 해먹으라고 손에 쥐어줬다. 얼마되지 않아 전화가 왔다. 어머니께서 나에게 주고 싶은 게 있으시다고. 굳이 또 내 손에 빵을 쥐어주셨다. 이런 게 사람의 정인가 싶다.
5. 여행갈 짐을 싸고 나니 잠이 오질 않았다. 혼자 하는 여행이 오랜만이라 수학여행 전 날처럼 설렜다.
6. 집 떠난 지 5시간만에 도착한 속초. 혼자 운전을 하니 심심함과 적막함에 몸부림을 쳤다. 도착하자마자 '해냈다'라는 성취감이 가장 먼저 들었다. 면허를 따고 이렇게 오래 혼자 운전한 건 처음, 무사히 도착한 것에 대해 감사의 마음이 들었다.
7. 도착하자마자 영랑호에 갔고 요가원에 등록했다. 그리고 첫 수련을 했다. 장시간 운전으로 긴장되었던 근육과 마음이 사르르 풀렸다.
8. 한 달동안 사는 것은 2박 3일 여행과는 다르다. 말 그대로 여기서 살아야 하니 이것저것 생필품이 필요하다. 특히 물. 쿠팡에서 주문하니 하루 만에 40병이 문 앞에 도착했다. 미리 라벨을 분리하려 보니 쓰레기가 제법 나왔다. 편리함을 위해 너무 많은 것들을 낭비하고 있는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9. 누가 지나가다 '고성바다 제일 예뻐'라고 했던 게 스쳤다. 그래서 무작정 떠났다. 혼자 하는 여행이 좋은 게 이런 거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뭐든지 할 수 있으니까. 내 눈앞에 펼쳐진 바다는 말 그대로 컸다. 파도소리도 컸고, 드넓었고, 짙었다. 위엄이 느껴지는 바다랄까. 저 가까이 가면 파도가 나를 잡아먹어서 순식간에 사라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파도소리를 들을 수 있는 카페에 들어가 4시간을 앉아있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시간을 보냈다.
10. 숙소에서 30분을 걸어 속초에 가장 유명한 서점, 문우당 서림에 갔다. 100년 가게와 어울리게 짙은 고동색 건물이 마음에 들었다. 큐레이션이 너무 잘 되어있어서 깜짝 놀랐다. 두 시간을 그곳에서 머물다가 책 두 권과 기념품 2개를 사 가지고 숙소에 돌아왔다.
11. 여행 온 기분을 내려고 와인을 샀다가 반해버렸다. 혼자 꽁냥꽁냥 저녁을 차리며 마지막으로 잔에 와인을 부을 때 모든게 완성이 되는 듯한 짜릿함이 있다. 마트에서 산 저렴한 와인은 연어와 먹어도 맛있고, 심지어 오징어순대와도 어울린다. 머그잔에 먹으니 맛이 떨어지는 것 같아 와인잔도 사버렸다. 이게 행복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