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cation
2021년 9월 5주
태어나서 지금과 같은 자유로웠던이 있었을까? 하루하루 누구의 방해도 없이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대학을 다닐 땐 주머니 사정이 여유롭지 않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지금은 어느정도 벌어놓은 돈과 매일 충전되는 24시간을 탕진하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근육의 가동범위가 1mm씩 늘어나는 걸 매일 느끼지 못해도 ‘어? 이게되네?’ 하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매일하는 것. 처음엔 모든게 어렵지만 꾸준히 하다보면 된다. 능력이나 재능은 결국 얼마나 꾸준히 할만큼 의지를 가졌는가를 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랑호를 산책하다가 발견한 속초시의 문구. 도시자체가 시민 한 사람이라도 더 행복해야 한다는 걸 외치다니 놀랍고 괜시리 부러워졌다.

날씨가 좋지 않은 날엔 카페에 콕 틀어박혀서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다. 속초에 유명하다는 시드누아 카페를 갔는데 규모도 상당하고 설악산이 보여 운치도 있었다.


카페에서 마시는 음료가 비싸다고 느끼다가 내가 머무는 시간과 제공되는 서비스를 계산하면 아주 저렴한 가격에 많은 걸 누린다는 걸 깨닫게 된다. 단순히 재화(음료) 말고 그 공간을 소비하며 만들어지는 생각, 영감 등 값을 매길 수 없는 것들을 담아가는데도 말이다. 좋은 것에는 아낌없이 투자하자. 절대적인 경험의 양이 쌓여야 퀄리티가 나온다.



동생이 속초에 놀러와서 어딜갈까 고민하다가 간 곳이 통일 전망대. 민간인이 갈 수 있는 한계선에서 바라본 북한은 너무 가까운 곳이라 기분이 이상했다. 눈 앞에 금강산이 보이지만 언제 갈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주에서 바라보면 지구는 경계선이 없지만 인간이 ‘국경’이라는 가상의 선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곳의 경계가 정해져있다. 분단역사 70년, 이제는 너무 많은 것이 바뀌어 통일될 수 없다고 하지만 역사를 보면 몇 백년의 삼국시대를 거쳐 우리민족은 통일했고 거룩한 문화를 이루었다. 여담으로 동생이 국사공부를 하면 고려 문화 부분이 비교적 쉬운편인데 이유가 고려의 수도가 개경이고, 현재 북한의 개성이라 관련 자료가 적어서 그렇다고. 웃픈 이야기다. 언젠가 금강산 그리고 백두산을 등산할 수 있는 날이 꼭 오기를 바래본다.


통일전망대에서 차로 1km 정도 이동하면 DMZ 박물관이 나온다. 같은 민족을 죽여야했던 슬픈 역사와 전쟁의 잔혹함에 말을 잃고 말았다. 내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는 이름 모를 누군가의 청춘을 바쳐 이룰 수 있었다는 걸 잊어서는 안된다. 삼시세끼를 꼬박꼬박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경제적 풍요도 엄마아빠 세대의 노력의 결과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되고. 늘 감사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살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입사를 며칠 안 남기고 속초까지 온 동생에게 책 선물을 하고 싶어 들린 문우당 서림. 금방 나올 줄 알았는데 한 시간을 넘게 머물렀다. 급하게 여행코스를 바꾼걸 잘했다며 만족하는 동생을 보니 괜시리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동생이 간 다음날, 어줍짢게 내리는 비 때문에 또 다시 카콕을 해야했던 나는 전날 동생과 가지 못한 카페를 대신 들렸다. 요새 핫하다는 고성의 온더버튼 이라는 카페였는데 건축, 브랜딩, 커피 나무랄게 없었다. 창 밖으로 철새들이 잠시 쉬고 있는 풍경도 감상했다. 감히 고성 카페 중 BEST 라고 평가한다.


몇 시간을 카페에 있다가 마트에 잠깐 들려 소떡소떡을 사고 집순이 모드로 들어갔다. 혼자하는 여행의 묘미, 즉흥적으로 결정하고 행동한다.


오랜만에 맑게 하늘이 개인 날, 주저없이 설악산으로 향했다. 중간 난이도의 설악산 울산바위 코스를 선택해 4시간만에 완등!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한 여름 같은 날씨 속에 묵언수행을 하며 등산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성찰하게 된다. 등산은 사서 고생(?) 이긴 하지만 건강과 사색,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최고의 취미활동이다.

등산을 해도 살이 잘 빠지지 않는 이유는 하산하고 먹는 식사가 대부분 거창하기 때문. 등산했다는 이유로 혼자 회를 시켰다. 화이트 와인을 홀짝홀짝 마시다 보니 게눈 감추듯 회가 사라졌다.


날씨가 너무 좋아 중앙시장에서 김밥한 줄을 사서 속초해수욕장에 피크닉을 갔다. 모래 위에 앉아 파도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으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여행은 꼭 비싼 걸 먹어야 좋은 걸 사야 하는 게 아니다. 아름다운 낯선 환경에서 좋아하는 음식과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오롯이 나만을 위한 시간이니까.

혼자하는 여행의 단점은 나의 모습을 담기 어렵다는 점이다. 사진첩을 보며 내 사진이 없는 걸 보고 밤에 오랜만에 찍은 셀카. (나이가 드니 이마가 넓어지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퇴사한 직장의 동료 두 명이 주말에 속초에 오겠다고 해서 ‘좋지!’라고 외쳤으나 막상 시간이 다가오니 막막했다. 두 명의 여행 스타일도 모르고 이미 가본 곳을 또 가려니 애매했지만 나름 보름 현지인으로 추천할 만한 곳으로 코스를 짰다. 여행지에 와서도 휴대폰을 놓지 않고 일해야하는 모습이 안타까웠지만 비행기를 탄 것만으로도 행복했다니 한 시름 마음이 놓였다.


동명항 근처에 있는 영금정으로 향했다. 영금정이 정자 자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바위산의 모양이 정자같기도 하고, 파도가 바위산에 부딪히는 소리가 신비해 신령한 거문고 소리 같다고 하여 영금정(靈琴亭)이라 불리었다고. 사진 찍는 사람들은 많은데 영금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사람은 이 중 얼마나 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전 직장에서 다닌 경험으로 전시의 패널이나 정보패널을 쉽사리 지나치지 못한다. 이유없는 글은 없다는 걸 알기에 패널이나 지도가 나타나면 다시 한번 읽게 된다.

생각지도 않은 타이밍에 건진 사진

리슬링 품종의 와인과 회가 참 잘어울린다. 너무 달지도 않은 산미가 맛을 확 잡아준다고 할까. 홍게와 화이트 와인의 궁합은 환상적이다.

양양이 얼마나 핫한지 두 눈으로 보고 나니 한 번도 안 가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가본 사람은 없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청정바다와 동남아를 연상하게 하는 상점들이 젊은이들이 모이게 한다. 서핑이라는 매력적인 활동도 한 몫하겠지만. 지방을 떠난 젊은이들이 모이는 도시, 아니 골목에는 다 이유가 있다. 황리단 길, 양리단길, 해리단 길 등 골목에서 가능성을 발견한다.


신세계 정용진 부회장이 언급해 더 인기가 많아졌다던 파머스 키친. 오픈시간에 갔는데도 대기가 58번이었다. 두 시간을 웨이팅하고 얻은 고귀한 식사. 햄버거는 맛있었지만 감자튀김은 그닥. 2시간을 기다릴 만큼의 맛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너무 오랜 기다림으로 맛의 효용가치가 떨어지 것일 수도 있다. 늘 생각하지만 기다리는 시간이 음식을 더 갈구하게 하고 가치있다고 믿게 한다. 그렇기에 과연 절대적으로 맛있다고 하는게 과연 가능할까? 맛도 혀의 축적된 경험과 주변환경에 따른 뇌의 판단인데 말이다. 배고플 때 먹는 음식과 배부를 때 먹는 음식은 다르고, 한국 사람과 미국 사람이 맛있다고 느끼는 음식은 다를 수 밖에 없다.


양양에 왔으니 3대 관음성지 중 하나인 낙산사에 들렸다. 소원을 들어주는 길이 있을 만큼 낙산사는 소위 말하는 기도발이 잘 듣는 절 중 하나라고 알려져있다. 그런데 막상 원하는 소원을 적으려니 가족의 건강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내가 원하는 건 가족 모두가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사는 것. 그것 뿐이다. 단순하지만 가장 어려운 잘 먹고 잘 살기.

차를 몰고 가다 창 밖으로 그네가 보였다. “저기 한 번 가볼까?’ 하고 급하게 갓길에 주차를 했다. 그렇게 정암해변에 내려 너나 할 거 없이 그네를 탔다. 서른을 훌쩍 넘긴 성인여자 세 명이서 깔깔 거리며 그네를 탔다. 여행은 늘 그렇다. 생각지 않은 곳에서 생각해 본적 없는 기쁨과 재미를 만난다. 그런 순간이 제일 기억에 남기도 하고.

중앙시장에서 사온 오징어회, 감자전, 수수부꾸미 그리고 와인을 곁들여 완벽한 저녁을 차렸다. 첫 직장에서 희노애락을 함께 나누었던 동료와 이 먼 곳에서 또 만날 줄 꿈에도 몰랐는데 참으로 소중하고 감사했다. 회사가 아닌 아름다운 속초에서 추억할 수 있는 밤을 만들고 있는 지금, 이보다 완벽한 휴가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