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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책

나를 가볍게, 삶을 자유롭게 <강신주의 장자수업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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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의 장자수업 2』는 장자의 철학을 현대적 맥락에서 풀어낸 책이다. 흔히 장자의 사상은 세속을 떠나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해석되지만, 이 책을 읽으며 장자가 강조하는 자유란 단순한 탈출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라는 점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떠남과 머무름, 비움과 채움, 자연과 인위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이 장자가 말하는 진정한 자유가 아닐까.

 

떠날 수 있지만  머문다는 것 

언제든 날아갈 수도 머물 수도 있는 것이 진정한 자유다

언제고 떠날 수 있지만 함께 있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떠날 수 있었는데도 떠나지 않고 머문다는 건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징표입니다.

장자는 자유를 강조하지만 떠나는 것이 무조건 정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언제든 떠날 수 있지만 머물기로 선택한 것, 그 또한 자유의 한 형태라는 점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자유는 단순히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일과 삶의 태도에도 적용될 수 있다. 반드시 떠나야만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선택이든 외부의 기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결정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 선택이 남의 기대나 강요가 아니라 온전히 나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어야만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것과 마주칠 때  삶은 변한다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그래서 타자나 사건과 마주치지 않는다면 새로운 삶을 만들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마주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늘 같은 사람을 만나고, 같은 곳을 오가고, 익숙한 일상을 반복하면서도 새로운 삶을 기대한다. 장자는 변화는 결국 새로운 경험에서 온다고 말한다. 변화를 원한다면 익숙한 것들을 벗어나야 한다. 가끔은 낯선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익숙하지 않은 일을 경험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생각의 폭도 넓어지고, 예상하지 못한 가능성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부재(不在)의 소중함 

없다는 경험은 오로지 있음을 기억하는 사람의 관념 속에서만 가능합니다.

없다는 건 모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개 무언가가 사라지고 나서야 그것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그러나 장자는 그 결핍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없음이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 수 있는 상태라고 본다. 장자는 비움이 새로운 가능성을 만든다고 말한다. 공간이든, 생각이든, 삶의 방향이든 불필요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면 본질적인 것을 보기 어렵다. 우리는 ‘더 많이’ 얻는 것에 익숙하지만, 오히려 덜어낼 때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다는 점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비움의 힘

가재도구로 가득 차 있으면 방안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비움의 힘입니다. 비웠기에 무언가가 들어올 수 있습니다.

날개마저 무겁다고 없애버리고 저쪽으로 도약할 때 저쪽은 그만큼 내게 가까워지는 법입니다. 

비움은 단순히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다시 정리하는 과정이 될 수도 있다. 무엇을 채울 것인가보다,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더 중요할 때가 있다.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나면, 오히려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 무거운 날개를 덜어내야 더 멀리 날아갈 수 있듯이, 불필요한 것들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나아갈 방향이 선명해진다.

 

기억하고 싶은 문장

 타자와 마주치기 전에 우리는 자신이 누군지 결정할 수 없습니다. 
 어떤 곳도 잠시 머무는 곳일 뿐이고, 모든 것은 잠시 함께하는 짝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타자도 그렇고 나 자신도 유목민일 뿐입니다. 그 어떤 변화의 국면에 영구히 머물러 정착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소중하다고 느끼기 쉬운 것들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중요한 건 젊음과 늙음, 정상과 불구, 삶과 죽음 중 어느 하나에 우월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감각입니다. 땅에 대한 2.5인칭의 감각, 유목민적 감각이 타인에 대해서나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필요한 이유입니다. 
 삶에 문제가 벌어지면 우리는 그렇게 만든 원인을 찾습니다. 사랑에 빠졌던 사람이 “왜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는가?”라고 자문한다면, 이 사람의 사랑에는 무언가 문제가 생긴 거죠. 사랑이 충만하고 사랑을 향유하고 있다면, 우리는 사랑에 “왜?”라는 의문을 붙이지 않습니다. 태어난 이유든 죽는 이유든 “왜?”라는 의문을 던진다면, 삶을 긍정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언제고 떠날 수 있지만 함께 있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떠날 수 있는데도 떠나지 않고 머문다는 건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징표입니다. 
 자기 욕망을 긍정하고 그걸 따르는 사람이 “자연적인 것에 의해 부려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인위적인 것에 부려지는 사람은 남의 찬양과 비난에 민감한 인간, 즉 허영의 인간입니다. 반면 자연적인 것에 부려지는 사람은 남의 찬양과 비난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남들이 좋아한다고 해서 무언가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좋아해서 무언가를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피지배계급의 서글픈 허영은 이렇게 탄생합니다. 자신이 지배계급이라는 걸 보여주려는 과시적 허영과는 달리 지배계급의 간택을 받으려는 피지배계급의 허영이기에 서글프다는 겁니다. 
 자연적인 것에도 능숙하고 인위적인 것에도 잘 대처하는 것은 오직 ‘완전한 인간[全人]’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가재도구로 가득 차 있으면 방 안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비움의 힘입니다. 비웠기에 무언가 들어올 수 있습니다. 날개마저 무겁다고 없애버리고 저쪽으로 도약할 때, 저쪽은 그만큼 내게 가까워지는 법입니다. 
 철학을 뜻하는 필로소피(philosophy)라는 개념이 결정적인 시사점을 줍니다. 필로소피는 ‘사랑’을 뜻하는 ‘필로스(philos, φίλος)’와 ‘앎’을 뜻하는 ‘소피아(sophia, σοφία)’로 구성된 말입니다. 보통 앎이 먼저이고 사랑이 다음이어서, 철학은 앎에 대한 사랑으로 이해됩니다.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 밝음과 어둠, 큼과 작음, 많음과 적음, 아름다움과 추함 등등 가장 원초적인 사유의 범주들은 기본적으로 시각적입니다 
 우리가 발을 잊는 것은 신발에 딱 맞은 것이고, 허리를 잊는 것은 허리띠에 딱 맞은 것 
 소화불량이나 변비에 걸린 사람에게 행복을, 명랑함을, 희망을, 자부심을, 현재를 기대하기 힘든 이유입니다. 반면 소화가 왕성한 사람은 위 속을 잘 비우고 쾌변을 향유합니다.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그래서 타자나 사건과 마주치지 않는다면, 새로운 삶을 만들 수 없습니다 
 '없다’는 경험은 오로지 ‘있음’을 기억하는 사람의 관념 속에서만 가능합니다. 
 삶, 젊음, 미모, 건강, 부, 권력, 지위, 평판 등을 생각해보세요. 그중 젊음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죠. 50대 중년이 거울을 볼 때, 그는 없어진 자신의 20대를 보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수록 그는 50대의 충만한 있음, 현재 자기 자신의 모습,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타인들을 보기 힘들 겁니다. 부재한 20대의 젊음이 블랙홀이 되어 그 모든 것을 빨아들일 테니까요. 하지만 잊어서는 안 됩니다. 50대 중년이 거울에서 부재하는 20대의 젊음을 보고 있을 때, 누군가는 멋진 주름과 희끗한 머리를 가진 그에게서 중년의 매력, 즉 성숙함과 안정감을 느낄 수도 있을 테니까요 
 예쁘지 않더라도 예쁘게 보여야 하고 쓸모가 없어도 쓸모 있어 보여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허영입니다 
 총명 이야기라는 제목에 등장하는 ‘총명(聰明)’이라는 말은 지금은 머리가 좋고 지적인 사람을 묘사할 때 주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총명은 원래 탁월한 청각 능력이나 시각 능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총(聰)’은 ‘귀가 밝다’는 뜻이고, ‘명(明)’은 ‘눈이 밝다’는 뜻이죠. 하긴 잘 듣고 잘 보아야 멍청해 보이지 않으니, 총명이라는 말이 똑똑한 사람을 가리키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일 겁니다. 진정으로 총명한 사람이나 진짜로 똑똑한 사람은 앵무새 같은 사람이 아니라 자기 생각과 자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 
 남의 눈으로 보지 말고 스스로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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